사랑을, 안 믿을 수도 있나?
Posted 2010. 10. 29. 23:21이런 고민은 바쁜 일상을 살다가 불쑥 나왔다. 한 달치 분량으로 꽉 채워진듯 벅찼던 일주일. 이리봐도 저리봐도 한국의 사회조직 부적응자인 나는, 커다란 새로운 조직에 가서 그 조직과 상하좌우로 연관이 있는 또 다른 크고 작은 조직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다고 내가 예의 커다란 조직의 구성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이번 한 주 동안 한강의 남과 북을 수차례 오가며 바삐 지났쳤던 그 길 어딘가 쯤에 내가 있는 걸지도.
빡센 일주일의 끝자락인 금요일이지만 내 주말까지 침범당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 하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난 며칠동안은 지하철에서 책을 펼쳐 들고도 지면의 문자와의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냥 귀에 흘러오는 음악에 기대어 갔는데. 오늘은 200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인 "사랑을 믿다"라는 궁금한 제목의 책을 들고, 짧으니까 지하철에서 다 읽어야지 하며 한 쪽 두 쪽 넘기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위를 움직이는 내 눈과 한 장, 두 장을 움직인 손가락이 내 전체에 맑은 위로를 주었다.
사랑을 믿다 - 라는 이 중립적인 어감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예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사랑에 대한 믿음에 킁- 한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비밀도 아니다. 난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은 만큼 당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누구나 철이 든 나이가 되면 (개인적으로 다른 숫자의 시기이겠지만) 사랑을 믿어서는 안되는 것 처럼. 말하는게 내겐 불편하다. 그런데,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 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1. 그런 일을 겪지 않는 사람들
2. 그런 일을 손쉽게 극복하는 사람들
3.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 버리는 사람들
4.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들. 죽을 때 까지.
나를 설명해 주는 범주가 있다는 것은 외롭지 않은 일인가? 그게 4번 일지라도? as far as i know, 금새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미리 끔찍한 상상까지 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절망이 절망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기대와 희망이 고개를 쳐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인생을 살다 보면 까마득하여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의외로 손쉽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에 들렸던 것뿐이다.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산이나 상비약을 챙기듯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오늘 <사랑을 믿다>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었는데, 여러모로 담백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구질구질하지 않은게 좋다. 특히나, 음식에 대한 묘사와 은유가 진정 맛깔스러워서 읽는 내내 신이 났고.
여튼,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권여선을 읽다가 받은 에너지의 기운은 real했다. 그 기운을 이어, 아침부터 시내에 미팅이 있어 상사 두 분과 차를 타고 남산 소월길을 지나는데, 뒷 자석에 앉아 고개를 젖혀 바라본 하늘이 너무 넓고 맑아서 정말 그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오늘 나는 적당한 때에 퇴근해서 집에와서 오랫만에 집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서 컴퓨터를 안고 이. 소중한 밤을 맞이했다.
또 한가지 기쁜 소식, 이번 일에서 평창이 중요한거라, 이 일을 시작하면서 몇 번 타다가 포기했던 스노우보드를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기대 했는데, 진짜로 1, 2월에 많은 시간을 평창에서 보내게 될 것 같다. 게다가 일을 가장 많이 같이 하는 내 보스는, 스노우보드 강사셨단다. w00t!!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궁뎅이패드를 어서 찾아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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