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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31 결국은 밥, 이었으. 4
  2. 2010.10.26 코뿔소.되기 & 노동 7
  3. 2010.10.20 낯설은 일상에 위로를 2

결국은 밥, 이었으.

Posted 2010. 10. 31. 21:18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5장이 불안,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다.
이번 주에 이 장을 읽으면서 내심 궁금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이다.
"자본주의의 억압을 넘어서려면 가난한 이웃들이 최소한 극단적 생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흠, 이 결론이 사실 쫌 싱거웠다.

근데, 오늘 여울친구들과 얘기 하면서, 내 생각이 닿은 곳은 - 그래, 밥이 그렇게 중요한것이다. 이게 해결되어야 하는데, 굶주린 사람들의 밥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그러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절명의 사안이 아닌자들이고, 그들은, if I may consider myself one of them, 그 걱정을 해주는데 (?) 한계가 있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장을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밥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 또 다른 욕망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캐안습 -_- 구조에 봉착하게 된다.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 자본주의 억압을 떨쳐버리기에는 너무나 깝깝한 첩첩산중의 장벽이 있다.
욕망과 욕구의 차이 defined by 강신주

며칠전에 트위터에서 읽은 건데,
한국에서 중산층을 정의하는 척도는 학벌, 차, 집, 월급의 정량적인 크기이고,
프랑스의 한 대통령이 (아마도 퐁피듀) 말했던 중산층은, 외국어를 하나 쯤 구사하고 세계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고 운동을 즐기고, 요리를 하나쯤 만들 줄 알아서 사람들과 즐기고, 정의를 위해서 나서야 할 때 나서는 사람이라는거다.

한국에서는, 일단 배는 고프지 않게 되어도,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한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찰나를 포착하기 전에, 최소한의 욕구의 범위가 욕망의 범주로 옮겨간다. 아주 재빠르게.

쉬운 답은 당근 없다. 그냥, 강신주가 인용한 부르디외의 말을 적어보련다.
어쨌든, 그래도 밥은 중요하다. 굶주리는 자가 없는거.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中 by Pierre Bourdieu (1977)
실업과 실업을 낳는 체계에 대한 의식이 표명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급박한 곤궁이 완화되어야만 한다. 무직을 의식하는 것과 무직의 객관적 근거를 의식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 한쪽에는 감정적인 반란이 있는데, 이것은 불안과 혼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생활조건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는 현실에 대한 체계적 고려로부터 나온 혁명적 과격주의가 있다. 이 두 태도들은 물질적인 생활조건의 두 가지 유형에 서로 대응한다. 하나는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와 토지를 박탈당한 농민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숙명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상근 노동자들로서, 그들에게는 희망과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의 안정과 보장이 제공되어 있다. 일상적 행동의 해체는 합리적 기획과 예측의 체계 -- 혁명적 의식은 그것의 한 측면이다 -- 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잠재적 '혁명의 원동력'인 프롤레타리아화된 농민들과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 역량'을 형성하지 못한다. 상근 고용 및 규칙적인 급여가 주어질 때,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시간에 관한 의식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판단과 희망은 생활세계에 따라 조직화된다. 그때에, 그리고 그때에만 혁명적 태도가 몽상 속으로 도피하거나 운명론적으로 포기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 -- 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 -- 와는 다른 것을 겨냥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기 포기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pp. 241-242, 상처받지않을권리)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가지 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이건 부르디외의 말이 아니고, 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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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되기 & 노동

Posted 2010. 10. 26. 23:56

고양이는 다리가 몇 개지요?
네 개입니다.
그럼 고양이가 두 마리이면 다리가 몇 개입니까?
8개.
네, 맞습니다.
그럼, 그 다리 8개 중에서 두 개를 빼면, 각 고양이는 다리가 몇 개일까요?
그 중 한 마리는 다리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다리가 다섯 개여도 고양이 일까요?
다리가 하나여도 쥐를 잡을 수가 있을까요?
그럼 고양이지!
고양이는 다리가 하나도 없더라도 쥐를 잡아야해. 왜냐, 그게 고양이의 천성이기 때문이지.

머, 이러면서 (연극속에서) 논리학자.라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 말놀이를 한다. 이성을 들이대면서. 대략, 계몽주의자들.

하얀 무대에, 커다란 방 문 크기의 하얀 판넬이 무대 가장자리로 양옆과 뒷면을 메우고,
하얀색 큐브 의자 9개가 무대 중간에 놓여있다.
8명의, 각이 딱 떨어지는 검정수트를 입고 검정 구두를 신은 등장인물들이 그 큐브에 앉아서 바삐 일한다. 락스로 세균청소까지 말끔히 한 듯한 분위기의 사무실. 여기에 술이 취해 헤롱헤롱한 주인공 베랑제가 머리는 산발을 하고 셔츠는 푸라헤치고 등장.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맞추어 성실히 살아가는 무리들, 예를 들어, 인간이라면 "주어진 의무감을 책임감 있게 수행해 나가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베랑제의 친구 쟝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데, 그 경직한 질서의 장에 베랑제가 균열을 내고, 숨구멍을 튼다.

그러던 어느날, 이 동네에 코뿔소가 등장하여, 사람들은
코뿔소가 나타났네,
말도 안되, 니가 봤냐?
아니 정말로 봤어. 굉장히 크고.. 또 어... 이렇게 생겼어. 정말 내가 봤다니까.
뿔이 하나야? 두개야?
뿔이 하나면 아시아 코뿔소야, 아프리카 코뿔소야?
아니면 그 반대야?
격하게 싸우다가, 하나 둘 씩 코뿔소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코뿔소의 출연을 목격한 자들의 증언을 비이성적이라고, 언론기사는 조작된 것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던 보타르까지도.

이 때, 베랑제와 그가 사랑했던 데이지만 인간으로 남아,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기로 다짐을 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드디어,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사랑을 확인했는데, 둘은 행복해지는가 싶더니만, 결국은 그녀는, 마음을 두고 있던 코뿔소의 무리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 그 무리에 합류한다.

베랑제가  orz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있겠노라, 절규하면서, 하얀 판넬의 반대면 거울이 무대 위에 벽을 만든다. 관객들이 모두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오라버니가 지난 여름에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가서 연기한 작품인데, 이번 주에 2010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일부로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여 오늘 보았다 - 코뿔소. 오빠가 작년 이맘 때 4, 5차 까지 늘어지는 코뿔소 오디션을 치르며, 피가 마르는 것 같다.고 하던게 기억이 난다. 벌써 1년.

부조리극 작가로 잘 알려진 유진 이오네스코. 오빠가 작년에 이오네스코의 <의무적 희생자>도 해서 봤는데,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굉장히 주제가 무거우나, 2010년 대한민국의 체제에서 엄청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오빠 연극을 보러갈 때면,
의례적으로 집에서 만든 빵으로 샌드위치를 한 보따리 만들어다 주곤 한다. 공연 전에 배우들이랑 스탭들이랑 나누어 먹으라고. 그런데 이번주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간식은 커녕 작품설명글도 제대로 못 읽어보고 갈판이었다. 꽃을 사가면, 배우는 무지 싫어한다. 나는 땜빵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기 싫어 문자를 보냈다.
"모사다줄까?"
"담배... 말보로레드"
"-_-"

공연이 끝나고 대학로예술극장 앞 GS25로 갔다.
"말보로 레드 두 보루 주세요."
"네, 5만원입니다."
"네? 오마눤이요?"
허거걱.
가난한 연극쟁이가 이 왠 부르조아질이냐.
담배가 싸지 않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돈을 막상 내려니 너무나... 비싸다.
난생 처음, 내 돈 내고 담배를 사 본거.

사실 오빠한테 5만원의 범위내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현금을 줄까 했었다. 그럼으로써 오빠가, 강신주의 <상처받지않을권리>에 나오는, 부르디외 식으로 말해서, 5만원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소멸시키며 구매할 만한 가치 있는 상품들은 무엇일까? 생각 해 보며, 담배를 덜 피우지 않을까 싶어서리.

그른데, 보니까, 현금이 없었다. 그래서 긁었다.
카드를.

그리고 나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길들이고 자극하여 끝없이 상품을 소비하게 합니다. 그 결과 노동으로 얻은 화폐는 소비되고, 그럼 또다시 노동을 할 수 밖에 없지요. 결국 소비와 노동이라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번영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지않을권리 프롤로그)
이번 주 부터, 정해진 날짜에 통장에 월급이 찍히는 댓가로,
내 시간과 적지 않은 기회비용을 팔기로 했다.
물론 노동에 대한 댓가를 금전적 보수에 국한시키는 것은 상당히, 상당히 비약적이지만,
일천한 내 노동히스토리를 뒤 돌아 볼 때, 이번 일은 과히, 참아내야 할 인고의 몇 달이 될 듯하다.

그래서 난, 지금 코뿔소가 되어야 한다. 내 안과 밖에 부조리와 참을 수 없음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내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럼 없으려는 투쟁은 잠시, 휴전에 들어간다.
지극히, 코뿔소가 되어 그렇게 살아야 한다. for the time being.


그른데,
되어야 하다니? 나도 이미 코뿔소가 아니었던가..... 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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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은 일상에 위로를

Posted 2010. 10. 20. 16:03
10대 초반 즈음부터 내 주변은 정치.경제.문화.사회.종교적으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로 붐비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신경끄고 나 대로 살아볼 수 있지 않았나 싶지만, 그 서로 다름의 간극속에서 그 "나대로" 사는게 안되었다. 나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분투가 지속. 그렇다고 해서, 지금 서른을 넘긴 나이에 내 정체성을 찾은 것은 아니고, 얼마전에는 나는 그냥 이렇게 끼인 상태에서 잘 살아가보는게 좋겠다는 well-meaning 조언을 받기도 했다. 흡!

2년쯤 전에 세진이의 추천으로 아트앤스터디에서 자본주의에 관한 강신주 교수의 강의를 접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장(자본주의)에 대한 무언가 불편한, 심히 불편한 점을 콕 찝어주는 시원함과 강사의 어눌하고 재미있는 말투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이 내용이 책으로-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 나왔을 때 4권을 사서 3명한테 선물을 하고, 나머지 한 권은,
고이 모셔두었다.
모셔두길 1년.
이번에 여울 세미나교재로 밀어부쳐... 간택되다.

확 꽂히는 머리말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숙하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길들어 있다는 것은 - 왠지 네거티브한 느낌이다.] 어떤 것에 길들면,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부분인 듯 편안하게 여기기 쉽지요. [근데, 편한거다. 바로, 불편하지 않다는 거. 발가락이 끼는 작은 신발을 신었을 때의 느낌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 불편함이 없다는 거.]  가령 누군가 그것을 문제 삼을 때, 우리가 마치 모욕을 당한 듯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 것은 너무 편하게 살지말라고 비판하는 것인가?] 하지만 친숙해진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 정말요?] 사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 [성찰! 이라는 big word]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무고 선택이고를 떠나, 그저 낯설은 내 일상이 불편하여, 뜨악하며 떠밀려 골치를 앓아왔다.] 삶은 우리 뜻과는 달리 항상 낯설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지요. [계속 이래야 하는거?] 미리 낯설어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지혜는 제공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슨... 지혜???]

살면서 내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편한 "느낌"을 항상 갈망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어떤 종류든 획일적인 장에 있으면 불안해 진다. 낯선것에 낯이 익어버린.
강신주책에서, 낯설음에 대한 변론이 내게는 깊은 위로가 되어서 요즘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덕분에 이상도 읽고.

강신주교수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학적 관점이 아닌,
이 돈 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우리 내면세계를 탐색하게 해주려고.
"자본주의로 인해 상처받고 분열되어 있는 내면세계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희망도 필요하다고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유.라는 것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 돈 체제에서 쪄들어 사는 우리들 중에는, 이로 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아주.

저자의 방법론:
이 책에 보면, 19세기 말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변모한 백화점이 동경을 거쳐 경성에 상륙한 당시 (1930년대) 상황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분석이 있다. 그런 백화점에,
오늘날 애기들은 간난쟁이 시절부터 유모차에 실려 이른 경험을 시작한다.
일한이 - 우리교회 정원 9명의 평균 연령을 화악 깍아주는 대학교 3학년 생 - 가 마침 학교에서 강신주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여담을 얘기 해 주었는데,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6개월 간 백화점에 가서 살다시피 하셨단다.
100년전의 모던보이들처럼.
salute to his pa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