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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0.20 낯설은 일상에 위로를 2

결국은 밥, 이었으.

Posted 2010. 10. 31. 21:18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5장이 불안,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다.
이번 주에 이 장을 읽으면서 내심 궁금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이다.
"자본주의의 억압을 넘어서려면 가난한 이웃들이 최소한 극단적 생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흠, 이 결론이 사실 쫌 싱거웠다.

근데, 오늘 여울친구들과 얘기 하면서, 내 생각이 닿은 곳은 - 그래, 밥이 그렇게 중요한것이다. 이게 해결되어야 하는데, 굶주린 사람들의 밥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그러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절명의 사안이 아닌자들이고, 그들은, if I may consider myself one of them, 그 걱정을 해주는데 (?) 한계가 있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장을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밥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 또 다른 욕망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캐안습 -_- 구조에 봉착하게 된다.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 자본주의 억압을 떨쳐버리기에는 너무나 깝깝한 첩첩산중의 장벽이 있다.
욕망과 욕구의 차이 defined by 강신주

며칠전에 트위터에서 읽은 건데,
한국에서 중산층을 정의하는 척도는 학벌, 차, 집, 월급의 정량적인 크기이고,
프랑스의 한 대통령이 (아마도 퐁피듀) 말했던 중산층은, 외국어를 하나 쯤 구사하고 세계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고 운동을 즐기고, 요리를 하나쯤 만들 줄 알아서 사람들과 즐기고, 정의를 위해서 나서야 할 때 나서는 사람이라는거다.

한국에서는, 일단 배는 고프지 않게 되어도,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한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찰나를 포착하기 전에, 최소한의 욕구의 범위가 욕망의 범주로 옮겨간다. 아주 재빠르게.

쉬운 답은 당근 없다. 그냥, 강신주가 인용한 부르디외의 말을 적어보련다.
어쨌든, 그래도 밥은 중요하다. 굶주리는 자가 없는거.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中 by Pierre Bourdieu (1977)
실업과 실업을 낳는 체계에 대한 의식이 표명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급박한 곤궁이 완화되어야만 한다. 무직을 의식하는 것과 무직의 객관적 근거를 의식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 한쪽에는 감정적인 반란이 있는데, 이것은 불안과 혼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생활조건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는 현실에 대한 체계적 고려로부터 나온 혁명적 과격주의가 있다. 이 두 태도들은 물질적인 생활조건의 두 가지 유형에 서로 대응한다. 하나는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와 토지를 박탈당한 농민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숙명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상근 노동자들로서, 그들에게는 희망과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의 안정과 보장이 제공되어 있다. 일상적 행동의 해체는 합리적 기획과 예측의 체계 -- 혁명적 의식은 그것의 한 측면이다 -- 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잠재적 '혁명의 원동력'인 프롤레타리아화된 농민들과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 역량'을 형성하지 못한다. 상근 고용 및 규칙적인 급여가 주어질 때,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시간에 관한 의식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판단과 희망은 생활세계에 따라 조직화된다. 그때에, 그리고 그때에만 혁명적 태도가 몽상 속으로 도피하거나 운명론적으로 포기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 -- 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 -- 와는 다른 것을 겨냥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기 포기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pp. 241-242, 상처받지않을권리)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가지 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이건 부르디외의 말이 아니고, 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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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은 일상에 위로를

Posted 2010. 10. 20. 16:03
10대 초반 즈음부터 내 주변은 정치.경제.문화.사회.종교적으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로 붐비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신경끄고 나 대로 살아볼 수 있지 않았나 싶지만, 그 서로 다름의 간극속에서 그 "나대로" 사는게 안되었다. 나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분투가 지속. 그렇다고 해서, 지금 서른을 넘긴 나이에 내 정체성을 찾은 것은 아니고, 얼마전에는 나는 그냥 이렇게 끼인 상태에서 잘 살아가보는게 좋겠다는 well-meaning 조언을 받기도 했다. 흡!

2년쯤 전에 세진이의 추천으로 아트앤스터디에서 자본주의에 관한 강신주 교수의 강의를 접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장(자본주의)에 대한 무언가 불편한, 심히 불편한 점을 콕 찝어주는 시원함과 강사의 어눌하고 재미있는 말투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이 내용이 책으로-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 나왔을 때 4권을 사서 3명한테 선물을 하고, 나머지 한 권은,
고이 모셔두었다.
모셔두길 1년.
이번에 여울 세미나교재로 밀어부쳐... 간택되다.

확 꽂히는 머리말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숙하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길들어 있다는 것은 - 왠지 네거티브한 느낌이다.] 어떤 것에 길들면,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부분인 듯 편안하게 여기기 쉽지요. [근데, 편한거다. 바로, 불편하지 않다는 거. 발가락이 끼는 작은 신발을 신었을 때의 느낌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 불편함이 없다는 거.]  가령 누군가 그것을 문제 삼을 때, 우리가 마치 모욕을 당한 듯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 것은 너무 편하게 살지말라고 비판하는 것인가?] 하지만 친숙해진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 정말요?] 사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 [성찰! 이라는 big word]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무고 선택이고를 떠나, 그저 낯설은 내 일상이 불편하여, 뜨악하며 떠밀려 골치를 앓아왔다.] 삶은 우리 뜻과는 달리 항상 낯설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지요. [계속 이래야 하는거?] 미리 낯설어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지혜는 제공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슨... 지혜???]

살면서 내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편한 "느낌"을 항상 갈망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어떤 종류든 획일적인 장에 있으면 불안해 진다. 낯선것에 낯이 익어버린.
강신주책에서, 낯설음에 대한 변론이 내게는 깊은 위로가 되어서 요즘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덕분에 이상도 읽고.

강신주교수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학적 관점이 아닌,
이 돈 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우리 내면세계를 탐색하게 해주려고.
"자본주의로 인해 상처받고 분열되어 있는 내면세계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희망도 필요하다고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유.라는 것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 돈 체제에서 쪄들어 사는 우리들 중에는, 이로 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아주.

저자의 방법론:
이 책에 보면, 19세기 말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변모한 백화점이 동경을 거쳐 경성에 상륙한 당시 (1930년대) 상황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분석이 있다. 그런 백화점에,
오늘날 애기들은 간난쟁이 시절부터 유모차에 실려 이른 경험을 시작한다.
일한이 - 우리교회 정원 9명의 평균 연령을 화악 깍아주는 대학교 3학년 생 - 가 마침 학교에서 강신주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여담을 얘기 해 주었는데,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6개월 간 백화점에 가서 살다시피 하셨단다.
100년전의 모던보이들처럼.
salute to his pa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