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한 주를 보내고

Posted 2014. 4. 12. 09:10

짐을 쌀 기력도 없다. 

일주일동안 다른 사람들(작가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는 일에 엄청 애를 썼는데, 나는 새로 시작한 일기장에 한 줄도 적지 못했다. 지금 이 글을 잘 쓸 수는 없지만, 짧은 기억속에 사라져 갈 것들을 붙잡아 보자.

작가들이 하는 얘기의 통역을 유심히 들었고, 통역을 정말 잘하는 분을 두 명 보았다. 나도 통역을 어설피나마 해보니, 내가 잘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통역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통역은 오롯이 다른 사람의 말을 전달해야 하는 일인데, 내용을 듣다가 내 생각이 솓구칠 때 불쑥불쑥 내 뱉으려 해서 말이다. 

여러 작가들의 얘기를 본의 아니게 경청하면서
(마지막 날에는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하게 되었고.
여러 권 (수십권에 이르기까지하는) 책을 쓰고도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작가들, 대단하고 부럽다.

장비를 들고 런던 시내를 돌아다녔다.
사실 택시를 타고 익스펜스하면 되었지만,
런던의 터무니 없는 택시비와,
그 돈을 내고서도 꽉 막힌 도로에 속수무책으로 갇혀야 한다는게 싫어서 바퀴달린 가방을 들고 끌고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며 튜브를 탔다.

목요일에는 오후의 마지막 행사와 저녁 행사 사이에 서너시간 가량이나 비었다.
졸음이 극도로 밀려와 호텔로 가서 한 시간이라도 잘까 하다가,
여유있게 움직이자 마음을 먹었다.
구글맵스왈 튜브로 30분 걸린다고 알려준 경로를
버스로 택하니 따블로 되어 한 시간이나 걸린다는데 
돌아서 가는 버스길을 택했다.


런던에 공원이 많다많다 했지만, 
2층 버스에 올라서 시내투어 하듯 1시간 가량이나 버스를 타다보니
정말 많은 공원을 지나쳤고, 지저분하지 않은 도시 곧곧에 파릇파릇 싹을 낸 나무들을 바라보자니,
몹시 설레었다.

2년전인지, 3년전인지
언제인가부터 봄나무는 나를 몹시 설레이게 한다. 

며칠 전 길에서 예쁜 어린아이를 보다가 문득,
저 애가 커서 징그러운 어른이 되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sadness.

봄나무를 보면서, 앙상한 것에 봉긋 솟아오른 생명력이
내 설레임을 앗아갈 여름의 무성함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며 
fast forward 겨울의 bleak한 장면을 떠올리며
슬퍼졌다.

이번 런던트립은 LBF의 명분으로 왔지만
런던오피스에 있는 팀 사람들과 만나서 밥먹고 얘기하고
그들을 좀 더 알게되고, 어떤 선입견을 뒤엎기도 하고,
좋은 만남이 있었는데.


일주일동안 많은 것을 혼자하면서 밥도 몇 번이나 혼자 먹었다.
맛을 충분히 느꼈다고 해야하나.
여러 가지 먹은 것 중에서 꼭 기억하고 싶은것은
- 아보카도 슬라이스와 토마토를 토스트 사이에 넣고 샌드위치로 먹은 것
- 올리브오일로 익힌 가지, 호박, 토마토 따위의 야채 볶음에 (일종의 라따뚜이) 잣이 섞여 있던 맛.

그리고 각각 세 번째 찾아 온 파리와 런던의 변화와 차이.
이럴수가…

저녁무렵에 그린 아이라이너는 모처럼 번지지도 않았고
지워야 한다는 귀찮은 생각에 바른것이 몹시 후회가 되는 밤이다.


Saturday, April 12, 2014 at 1:10:30 AM B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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