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Honest Exit" by Dinaw Mengestu

Posted 2010. 7. 26. 00:20
[[ 진중권님의 트윗 (10/07/25)에서: 
철학, 하면 할수록 머리가 빠개지는 학문입니다. 저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분절화되지 않은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중엔 도대체 우리의 언어가 과연 사유에 적합한 수단인가 회의가 드는 지점까지.... 
일단 철학은 됐고요, 
나만 그런건 아니겠지만,
단순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때도 언어라는 것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해서 답답하다. 너무. Hence, the subject of language has boggled the minds of modern/post-modern philosophers. And then, for me, there's this question of whether to think and express in English or Korean. Being bilingual, albeit imperfect, can bring complementary effects from both languages, but at the same time, it interferes with achieving excellency in either. In other words, it always feels lame. 글 쓰는데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쓰지 않는 것을 나름 내 철칙으로 밀어붙여 왔는데, 너무 피곤하다. And it takes too much time. So, now, whatever... Let me be. ]] 

두 세달 동안은 매주 받아서 쌓아만 놓던 뉴요커 매거진을 다시 집었다. 나가는 길에 가방이 무거워 책 한 권 대신의 목적으로. 가벼운 주간지라 어깨는 편하지만, 지하철에서 서서 얇은 종이를 한 장 씩 넘기기가 쉽지 않다. (그치만, 침 바르기는 노노)

뉴요커에서 여름 특집으로 20 Under 40 - 40세 미만의 픽션작가 20명을 선정해 단편집 이슈를 만들었다. 세대를 대표할 만한 작가들을 골랐단다. 그들-편집자-이 인정하듯이 리스트를 만든다는 것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에티오피아 출신 작가가 쓴 글을 읽고 나서 선정된 작가군을 보니 흥미롭다. 20명 중에 넌네이티브들의 출신지를 보면 나이지리아, 페루, 라트비아, 중국, 에티오피아, 유고슬라비아, 러시아가 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외부의 것의 아말감이면서, 다양성 반영에 매우 뿌듯해하신다. 나도 머, 그것 부터 확인한다. 나름 병이다.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압박감. 



스토리인즉슨,
뉴욕 맨하탄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문학수업을 가르치는 에티오피아 헤리티지의 선생님이 평생 아버지랑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에게 독백을 시작하며 그 이야기의 청중이 학생들로 옮겨진다. 그동안에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라곤 "Take this," "Don't touch," "Leave now" 등의 짧은 말 뿐. 아버지의 단편적인 조각말을 짜맞추어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인생사를 들려준다.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에티오피아에서 탈출하여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이 뻥일 수 있다. 주인공이 풀어나가는 얘기이기 때문에) 수단의 한 항구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드림"의 장소로 갈 것을 꿈꾼다. 아브라임이라는 현지인을 만나 이런 저런 도움을 받는다. 아브라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도와주는. 척. 하는 사람. 아버지는 수단의 한 항구에서 - 자신은 한 모금도 마실 없는 - 차(茶)를 나르기도 하고, 항구에 드나드는 짐을 나르기도 하고, 자다 보니 자기가 누운 곳이 시체 옆이기도 했고, 등등 등등등. 아브라임은 아버지에게 스트레칭을 열심히 연습하라고 한다. 몸을 구부리고 굴리고 수축하고 늘리는. 수단을 탈출할 때 배의 짐칸에 실려 목적지까지 살아서 가기 위한 생존을 위한 연습이었다. 
... my father did not actually make it off that boat alive. He arrived in Europe just as Abrahim had promised he would, but an important part of him had died during the journey, somewhere in the final three days, when he was reduced to drinking his urine for water and could no longer feel his hands or feet.
아버지는 살기 위해 정당한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돈이 많이 들겠지. 그리고, 잡히지 않고 달아남 자체가 상대적으로 honest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정직한 방법으로 인간이 될 수 없는. 아브라임의 잔인함에 이를 갈아도, 아버지에게 다른 옵션을 없었을 것이다.
My father took the photograph from Abrahim and placed it in his pocket. He didn't say, "Of course I will do this," or even a simple "Yes," because such confirmation would have meant that there was an option to refuse, and no such thing existed between them. 
이 글을 읽으면서 추노가 생각났다. 양반의 만행에 말살당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꿈을 꾸는 노비들. 자기들 끼리 찌질하게 궁시렁거리기만 하다가, 어느날 게중에 똘똘이가 등장하여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지핀다. 억압과 주눅만 알고 살던 노비들의 가슴에. 여기서 잠깐 삼천포: 쉰들러의 리스트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 - 무더운 날씨에 기차간에 꾸역꾸역 미여 터지게 실려가는 유태인들을 향해 호수로 물을 뿌려주는 쉰들러를 보고서, 옆에 있던 독일군이 낄낄대며 말한다. "You are being cruel. You are giving them hope." 추노에서도, 똘똘이 노비를 가칭한 양반의 하수인이 노비들의 취약점 - 인간이고픈 열망 -을 어뷰즈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쟁취...하려고 했다.
By the time my father finally made it to London, eighteen months later, he had begun to think of all the men he met as variations of Abrahim, all of them crippled and deformed by their dreams....
The picture of Abrahim's daughter melted away near a large green hedge with ripe, inedible red berries hanging from it. For many nights afterward, he refused to think about her or her father. There were no rewards in life for such stupidity, and he promised himself never to fall victim to that kind of blind, wishful thinking. Anyone who did deserved whatever suffering he was bound to meet.
ripe, red but inedible. 

추노는 몇 백년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 얘기는 20세기에, 그리고 아마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만연하던 일이다. 

인간으로 사는게 너무나 사치인 그들. 내게 적용되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 커피를 쪼끔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에 새로운 관심을 두게 되었지만, 내가 마시는 커피가 어떤 사람들의 손과 어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땅을 거쳐서 온 것인지 막연하기만 하지만. 
 
만족스럽게 내면을 표현, 전달하는 것은 어렵다. 내 속의 정황 파악 자체가 어려울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처한 원초적인 상황 설명으로 멀리있어 보이는 사람과 소통에 대한 최소한의 장이 마련되고, 머 유치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인생의 덫 없음을 공감하게 된다. 내가 처해서 살아야 하는 오늘과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오늘이 다르고, 에티오피아에서 배고파하며 오늘을 보내는 사람의 처지가 다르지만. 공감적인 행위를 그려보고, 다른 점을 느낄 수도 있고. 기본적인 해석은 서로에 대한 예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니까, 호모사피엔으로서 보편적인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구박구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 무슨소리?) 그런데, 싸움은 늘 극심한 불균형의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존엄성은 쌍방소통이다. 가해자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못 할짓을 하는 것이다. 전쟁하지 말자. 군사훈련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번 군사훈련 때는 또 무슨일이 일어날래나 살벌한 염려를 웃음따먹기로 하는 국민으로 전락시키는 상황이 싫다.

내가 사는 에티오피아 커피콩이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래나. 항구는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일부 기득권으로 통제될 텐데.

섬세한 네레티브의 문학선생님 -- 읽는 내내 여성선생님이라고 가정하고 읽었는데, 읽고 나니 그 어디도 젠더에 대한 레퍼런스는 없고, 나중에 보니 작가도 남자다. Minaw가 여자 이름인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