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Posted 2012. 11. 7. 23:00


원래 고깃집에 가면 풀과 버섯과 양파구이로도 푸짐하게 혼자 잘 먹는데, 오늘 뉴욕에서 온 손님이 먹고 싶은게 코리안바베큐라 하여 간 고깃집에서는 풀도 없고 딱히 아그작아그작 풀을 씹을 힘도 없어서 그냥 고기를 먹었다. 오랫만에 먹는 구이 고기였다. 맛있게 다 먹고서 나오면서 옷에 밴 냄새로 지하철 타는 게 조금 살짝 거시기했지만, 그냥 탔다. 맥북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맥에어(와 잡다구니하게 매일 들고당기는 것들)를 어깨에 짊어지고 한 손에는 태백산맥 10권!을 들고.

그런데 저기 두 사람 건너쯤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냄새를 풀풀 풍기는 50-60 대 아저씨들이 걸걸한 목청을 높여 나 취했어- 존재감을 열차 가득히 알리고 계셨다. 에효, 나한테 냄새가 나도 즈 아저씨들이 다 커버해주겠군, 하고서... 두 발을 딛을 위치를 확보한 후 그냥

 책을 펼쳐들고 읽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아저씨들이 미웠다. 그런데 아저씨들의 대화가 갑자기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을 한다.
"아 태백산맥, 나는 저거 옛날에 출판사에서 줄서서 받아서 읽었자나. 난 또 저런세상이 있는 줄 몰랐네. 살겠다고 발버둥친 사람들을 다 국가가 좌익으로 몰아친거 아니야. 나는 저거 읽고 세상에 눈을 떴지. 저게 훌륭한 게 뭐냐면 여러저러한 사람이 나오는 데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하는 인물이 있다는거야. 나는 머 거기 주인공중에서 김범우가 나오는 데.... 사람들이 다 자기랑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건데..."

갑자기 너무 웃겼는데, 웃겼다기보다는 반가워서 미소짓고 싶었다고 해야할까? 아저씨들을 한 번 보고 눈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다가 그냥 돌아서버렸다. 혹시나 아저씨들하고 지하철안에서 한 판 대화가 펼쳐질까봐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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