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생각

Posted 2011. 1. 12. 23:39
하나.

통상적인 것은 아니라지만, 내가 처음 구경해 본 배우 오디션은 남산에 우뚝 솟은 삐까번쩍한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사전 회의를 하는 동안 완전 overpriced 클럽샌드위치를 먹고서 2층에 예약된 오디션 장으로 올라갔다. 문을 들어서니 커다란 조명 두 개가 오른쪽 왼쪽 하나씩, 문쪽을 향해 서있고 그 뒤로 마호가니 칼라의 테이블이 전체적으로 중후한 서재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그 방과 어우러지게 놓여 있었다. (대략, 아라비카 인스턴트 커피 광고에 나오는 방 분위기.) 테이블 위에는 오디션 심사자들 이름표 딱지 아홉개가 각 소속지별로 주루륵 놓여 있었다. 웃기지만, i was about to take one of the seats at the table.

테이블 끝을 돌아 내 자리를 찾아 않아서 캐스팅 회사에서 준비한 오디션 후보들의 프로필 사진을 훑어 보았다. 내가 만져본 A4용지 중에서 젤 빠빳한 질의 종이에 칼라로 인쇄된 그녀들의 사진은 매끈했다. 시간이 되어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후보들이 한 명 씩 들어왔는데, 내가 몇 십분 뿐이 보지 못한 시크릿가든 1회에서 나왔던 여성도 있었고, 씨에프에서 본 듯한 사람도 한 명 있었고,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톡톡 튀는 발람함이 마냥 귀엽기만 했던 1인 등. 모두들 짧디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감독의 요청에 따라 아무런 도구 없이 즉흥연기를 펼쳤다. 그 중 어느 누구도 얼굴 사이즈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배우,라는 사람들이 늘 위대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제 만난 아가씨들은 배우라고 하기에는 좀 뭣한,  스물 두 세살 가량의 그냥 이쁜 어린 여자애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밖에서 줄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들어와 조명발 아래 웃음을 쪼개며 갑작스레 펼치는 연기를 보고 있자니, 나는 업계에 낯설은 사람으로서 너무나 뻘쭘스럽고 어색했다 몹시. 열여덟 눈동자의 응시 앞으로 놓인 커다란 테이블은 그녀들이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만큼 무언의 중압감을 실어 건내는 듯 했고. 그녀들의 갸냘픈 몸둥이가 테이블에 깔릴것만도 같았다.

이런 감정은 무엇인가? 측은인가? 왜 난 측은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들은 화려한 화장과 아주 짧은 치마와 허거걱 높은 구두를 신고서 수 차례 이런 오디션이라는 장소에 서보았을텐데 말이다. 자발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자신을 드러내어놓으면서. 썸데이 강자가 되고픈 욕망에서 이지 않을까.

둘.

회사에서 저 높은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한 여성이, 갑자기 우리 팀 파트너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서실 및 그 아래 임원들에 의하자면. 그것이 그녀가 우리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아랫 사람들이 그 회사 이름을 언급하고 설레발쳐서 인지 모르겠으나, 지난 주 어느날,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되는 업무에 신경 쓸 일이 많은 상황에서, 그녀가 해외파트너를 만나셔야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따라 비서실에서 내게 할당한 업무는 계약 다 하고 실무 회의 다 하고 이미 공동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 업체에 대한 소개글과 그 쪽의 인력과 현황과 그녀가 그쪽 대표를 만났을 때 물어보면 좋음직한 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 미팅이 발생하는 말도 안되는 타이밍의 어이없는 시점은 차치하고고고, 그 분이 “하실 말씀”을 정리하라니?
“(최대한 무관심성을 유지하며, 오바스럽게 공손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부사장님이 하실 말씀을 정리하라니요?”
“아, (완전 진지 심각포스로) 우리 회사 입장에서 부사장님이 하셨으면 좋을 말을 준비하시면 되요.”
“(최대한 무관심성을 유지하며, 오바스럽게 공손히) 아, 그럼 부사장님이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아니오 없어요.”
“(최대한 무관심성을 유지하며, 오바스럽게 공손히) 네에.”
내가 전화를 끊자, 옆에서 내가 통화하는 걸 듣고 있던 보스가,
"너 왜 그렇게 친절하게 말하냐? 쳇, 권력자 앞이라고 약한척 하는거야? 비굴한거야?"
... 어안이 여전히 벙벙. "아니, 그녀가 너무 측은해서요."

납득되지 않은 업무에 대해서 성질을 죽여가며 준비 - 그녀 밑에 있는 여러 임원아저씨들의 지시를 받고 비서실에 최종 확인을 받는 과정 - 를 마친 후 이 미팅에 들어가보니, 테이블 상석에 앉아 해외파트너 대표에게 여유있는 모습으로 어줍잖은 (내 취향은 아니더라도 의례적으로 필요는 한) 말을 건네고 내가 작성한 자료의 말을 읊어대는 그녀의 모습은, 완벽한 연기로 보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양옆에 주루룩 앉은 부하들에게는 존재감 없음을 확실히 느끼도록 해주었다. 완전 다소곳이 앉아 있던 우리들 말이다. 이날 미팅은 20분도 걸리지 않아 내가 직접 그녀를 제대로 겪어볼 일은 없었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권력도 악취가 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can't help with the prejudice.

대부분의 권력소유자들이 지랄맞은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어 가며 그들을 모시는 사람의 탓도 크다고 본다. 대표적인 예로, 목사들과 교수들의 거드름은 당사자 보다 주변인들이 너무 그들을 떠 받들어 주는 바람에 그들이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싸가지 때문이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아니,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것이,
웬만한 내면의 싸움으로는 내치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권력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몸뚱이가 달콤하리 편한,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속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조직에서 내가 바라는 바가, 여러 단계 거침없이 내 말 한마디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는 거.
좋은 것과 꾸진 것이 있으면 내가 좋은 것을 갖게 되고,
맛있는 것과 별로인 것이 있으면 내가 맛있는 것을 먹게 되고,
좀 더 푹신하고 넓은 자리에 내가 앉게 되어,
내 몸뚱이와 정신머리가 더더욱 까탈스러워지지만,
여러 사람들이 내가 기분이 나빠질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 대략 알아서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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