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동안

Posted 2010. 11. 8. 23:52
1.
오늘 팔랑팔랑한 - 그래서 바람 쌩 할 때 나플락거린 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찬 바람에는 부츠가 참 좋지만, 하필 오늘은 모처럼 외근도 없어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게 되어, 종아리와 발을 모두 밀폐상태로, 참말로 답답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가 오밤중에 귀가하여 부츠의 지퍼를 쭉 내리고 거기서 발을 꺼냈을 때의 시원함은, 더운 여름날 땀을 비질 흘리고 먹는 밀크쉐이크 맛 설레임보다 더했다. (my readers, don't 킁킁 please. -_-)

아, 근데 점심시간에 잠시 통풍이 있었드랬다. 신발을 벗어야 했던 칼국수 집이었던고로.

2.
점심을 먹고, 꼬랑내나는 은행이 빼곡한 길을 터벅터벅 걸어, 아이폰을 개통하러 갔다. 여차저차 해서, 드디어 3GS 중고를 구한것이다. 인터넷 서치로 시간을 꽤 썼지만, 결국은 아는 오빠한테 사기로. 사무실 근처 KT 올레 쿡 대리점에 가서 기다리는 동안 내 아이팟을 들고 트윗을 슬렁 읽고 있는데, 예의 그 오빠가 날린 첫눈타령 트윗이 눈에 들어왔다. 왠 눈, 하면서 순간 고개를 창밖으로 훽 돌리니. 노란눈이 내리고 있었다. 은행나무에서 와르르 떠날려 보내진 노란 잎사귀들.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 때 한 차례 나뭇잎이 흩날리더니, 그 후는 날리는 잎을 볼 수 없었다.

멀찍하니 바라볼 때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대할 때 풍기는 강한 악취를 지닌 은행은, 참말로 인간적이다.

3.
아이폰을 개통하면서 이 전화에 있던 전주인의 정보를 싹 다 지웠다. 내가 미개통된 이 폰을 며칠 동안 들고 다니면서 찍었던 사진은 어제 컴퓨터에 옮겨 놓았기에 안심하면서. 그런데, 흑, 토요일에 공지훈 강의 녹음한 것을 까먹었다. 날렸다. 영국으로 장기출장 가있는 신모군이 강의 녹음해 달라고 특별 부탁을 했는데, "미안 -_- "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 이기에, 더 미안했다. 신군이 내 블로그를 보고 미안한 마음을 알아주길. 볼라나 몰라 근데.

4.
내 블로그에 검색어로 오는거 말고, 스파이씨라이프.넷 url을 찍고 오는 사람들은 누군지, 궁금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작정들이 있으셨는지, 3인이 내게 내 블로그를 아주 자주 와서 읽고 있다고 말했다. 옹, 당신이였군요! 댓글이 느무 없는지라, 그냥 혼자 궁시렁대는 심정으로 (아 물론, 내가 아는 고정독자가 2인 있기는 하다 ㅎㅎ) 글을 쓰고 사진을 붙여 보는데, 갑자기 세계가 날 지켜보고 있는듯하다. (as of this writing, the G-20 Seoul Summit is a few days away.)

아 정말,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나서. 근데 왜 댓글은 안 달아? 하려고 했으나, 안했다. 굿. 댓글을 강요하는 행위는, 블로그로 소통하는 즐거움에 예의 없는 부담감을 던지는 것 같다. 그 거친 부자연스러움으로 일상에 피곤을 더 덧 붙이는.

5.
피곤한 일상은 default라고 치고, 살아가는데는 소소한 기쁨이 듬뿍한 것이 좋다. 내가 여자인고로 한 건 큰 거 보다는 자잘하지만 많은 거를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지금 같이 일하는 (or 내가 모신다고 말해야 하나 한국식으로?) 내 보스를 3주 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testosterone을 듬뿍 함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 이 분한테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나 고민을 살짝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선입견은 선입견이었고 나름, 잘 지내고 있다. 키가 185cm쯤 되고, 손은, 그 손으로 한 대 맞으면 날아갈것 같애요.분위기로 커다란데,  그 손에 늘 moleskine plain reporter's notebook을 들고 메모하신다. 수첩을 들은 손과 들린 수첩의 부조화도 눈에 띄었지만, 옆으로 넘기는 공책이 아닌 위로 넘기는걸 쓰면 불편지 않나, 오지랖 넓게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 옆 자리에서 메모를 하시며,
"이제 이것도 다 썼네."
"아 네..." (그냥 내 일 함.)
"집에 갔더니, 와이프가 내가 수첩을 다 써가는걸 언제 봤는지 똑같은걸 두 개 새걸로 사 놨더라고."
"우와우와우와 디게 sweet하시네요. 진짜 좋으시겠다." (급 호들갑)
"에고, 나 같은 사람하고 사는거 참 힘들텐데...."
"아 왜요? 집에서는 안 그러실 것 같은데." (이 말은 내뱉어져 나왔다. -_-)
"머라고?"
"어머어머어머, 그게 아니구요. -_- " (급 수습)
"아무튼, 이따가 뉴문에 이멜 보내야 하니까 잊지말고."
"네, 아, 근데 너무 멋지다. 그렇게 딱. 후후"
거기서 수첩 얘기는 끝났지만, 결국 보스의 자랑질이었지만,
i really couldn't get over with his little heart-warming story for a while.

살면서, 모두들 부귀영화를 바래서 피곤에 쪄든 삶을 감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피곤한 삶이란 이 세상에 희귀하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치면. 이럴 때, 따뜻한 일상을 소소히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그 피곤을 상쇄시켜주고도 남는 큰 힘이 아닐까 싶다. 일상의 결에 틈틈히 박힌 사랑의 숨결. 결혼을 한다면 이런걸 꿈 꿔야겠지. 내 주변에는, 반증의 사례가 너무나 많지만, 희망하련다.


아, 갑자기 고소하게 볶은 땅콩이 먹고 싶으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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