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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4 그래도 살만한...
  2. 2010.10.29 사랑을, 안 믿을 수도 있나? 2

그래도 살만한...

Posted 2010. 11. 14. 22:09
Please stop and listen to this performance by Valentina Lisitsa with both your ears and eyes, with special attention to her nerves extending from her finger tips all the way through her biceps and triceps.




웬 아이가 보았네 中 by 권여선 from 내 정원의 붉은 열매 (한 권 사셈)

14
뾰족집 여류시인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사라진 뒤에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존재였다. 마르지 않는 샘은, 그 샘물을 달게 마시는 사람들(이를테면 이상건씨 같은 경우)에게는 기적과 은혜의 대상이지만, 그 샘의 물을 다 퍼내고 그 바닥을 드러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를테면 내 어머니 같은 경우)에게는 고역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뾰족집 여인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그렇게 둘로 나뉘었다.

남자들이 다 그 샘물을 달게 마신 건 아니듯(이를테면 내 아버지처럼 샘의 그림자만 보고도 줄행랑을 친 축도 있었으니까), 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 샘의 물을 퍼내겠다고 달려들지도 않았다(애심이 엄마처럼 샘 주변을 하염없이 맴도는 축도 있었으니까). 아마도 여자들 중에서 뾰족집 여류시인을 가장 선망했던 그 가엾은 애심이 엄마는 여류시인에 대해 지나친 억측이 난무할 때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까만옷에 희끗희끗 달라붙은 먼지를 떼내봐요. 그게 어디 희던가요. 워낙 시꺼먼 데 붙어 있다보니 희게 보이는거죠."

모두둘 그래서? 하는 투로 쳐다보면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튀는 사람이 자기가 튀려고 해서 튀는 게 아니에요. 바탕이 튀게 하는 탓이 큰 거죠."

말이 끝나고 몇 초 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아니, 바탕이 뭐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 바탕이 시커멓다는 얘긴가봐요."

"그러니까 그 새댁이 자기가 튀려고 해서 집을 튀어나간 게 아니라 우리 때문에 집을 튀어나갔다는 건가?"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듣겠군요."

뾰족집 여류시인에 대한 반감과 적의로 똘똘뭉친 마을 여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잉잉대고 공격하면 그 가엾은 애심이 엄마는 결국 굴복하여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훌쩍거리며 참회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애심이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마을 여인들 중 아름답고 진실해 보였던 것 같다. 외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추하지는 않았다. 못난 걸로 치자면 애심이 엄마도 내 어머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누가 저 샘의 물을 다 퍼내라고 시켰는지 몰라도 내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여인들 대부분이 기필코 저 존재의 바닥을 보고 말겠다고 소문의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며 추함의 극치를 드러냈던 데 비해, 애심이 엄마는 낯설고 신비로운 존재의 출현에 잠시나마 설렜던 마음을 쉽게 부정하지 않으려는 은장도처럼 작은 용기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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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안 믿을 수도 있나?

Posted 2010. 10. 29. 23:21
살면서 겪는 일들은, 내 감정의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 온갖 세포를 들쑤신다. 어떤 일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멋있게, 제대로, 옳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내멋대로 하면 되는 것인지...하고 낡은 어른스러운 고민을 하다가 너무나 곤혹스러운건, 기름을 바르지도 소금을 뿌리지도 않은 민밋한 마른김 같은 반응이다. 반응이 없지는 않는데 보이지도 않고.

이런 고민은 바쁜 일상을 살다가 불쑥 나왔다. 한 달치 분량으로 꽉 채워진듯 벅찼던 일주일. 이리봐도 저리봐도 한국의 사회조직 부적응자인 나는, 커다란 새로운 조직에 가서 그 조직과 상하좌우로 연관이 있는 또 다른 크고 작은 조직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다고 내가 예의 커다란 조직의 구성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이번 한 주 동안 한강의 남과 북을 수차례 오가며 바삐 지났쳤던 그 길 어딘가 쯤에 내가 있는 걸지도.

빡센 일주일의 끝자락인 금요일이지만 내 주말까지 침범당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 하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난 며칠동안은 지하철에서 책을 펼쳐 들고도 지면의 문자와의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냥 귀에 흘러오는 음악에 기대어 갔는데. 오늘은 200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인 "사랑을 믿다"라는 궁금한 제목의 책을 들고, 짧으니까 지하철에서 다 읽어야지 하며 한 쪽 두 쪽 넘기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위를 움직이는 내 눈과 한 장, 두 장을 움직인 손가락이 내 전체에 맑은 위로를 주었다.

사랑을 믿다 - 라는 이 중립적인 어감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예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사랑에 대한 믿음에 킁- 한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비밀도 아니다. 난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은 만큼 당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누구나 철이 든 나이가 되면 (개인적으로 다른 숫자의 시기이겠지만) 사랑을 믿어서는 안되는 것 처럼. 말하는게 내겐 불편하다. 그런데,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 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1. 그런 일을 겪지 않는 사람들
2. 그런 일을 손쉽게 극복하는 사람들
3.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 버리는 사람들
4.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들. 죽을 때 까지.

나를 설명해 주는 범주가 있다는 것은 외롭지 않은 일인가? 그게 4번 일지라도? as far as i know, 금새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미리 끔찍한 상상까지 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절망이 절망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기대와 희망이 고개를 쳐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인생을 살다 보면 까마득하여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의외로 손쉽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에 들렸던 것뿐이다.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산이나 상비약을 챙기듯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
오늘 <사랑을 믿다>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었는데, 여러모로 담백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구질구질하지 않은게 좋다. 특히나, 음식에 대한 묘사와 은유가 진정 맛깔스러워서 읽는 내내 신이 났고.

여튼,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권여선을 읽다가 받은 에너지의 기운은 real했다. 그 기운을 이어, 아침부터 시내에 미팅이 있어 상사 두 분과  차를 타고 남산 소월길을 지나는데, 뒷 자석에 앉아 고개를 젖혀 바라본 하늘이 너무 넓고 맑아서 정말 그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오늘 나는 적당한 때에 퇴근해서 집에와서 오랫만에 집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서 컴퓨터를 안고 이. 소중한 밤을 맞이했다.

또 한가지 기쁜 소식, 이번 일에서 평창이 중요한거라, 이 일을 시작하면서 몇 번 타다가 포기했던 스노우보드를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기대 했는데, 진짜로 1, 2월에 많은 시간을 평창에서 보내게 될 것 같다. 게다가 일을 가장 많이 같이 하는 내 보스는, 스노우보드 강사셨단다. w00t!!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궁뎅이패드를 어서 찾아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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