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만한...
Posted 2010. 11. 14. 22:09웬 아이가 보았네 中 by 권여선 from 내 정원의 붉은 열매 (한 권 사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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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집 여류시인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사라진 뒤에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존재였다. 마르지 않는 샘은, 그 샘물을 달게 마시는 사람들(이를테면 이상건씨 같은 경우)에게는 기적과 은혜의 대상이지만, 그 샘의 물을 다 퍼내고 그 바닥을 드러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를테면 내 어머니 같은 경우)에게는 고역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뾰족집 여인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그렇게 둘로 나뉘었다.
남자들이 다 그 샘물을 달게 마신 건 아니듯(이를테면 내 아버지처럼 샘의 그림자만 보고도 줄행랑을 친 축도 있었으니까), 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 샘의 물을 퍼내겠다고 달려들지도 않았다(애심이 엄마처럼 샘 주변을 하염없이 맴도는 축도 있었으니까). 아마도 여자들 중에서 뾰족집 여류시인을 가장 선망했던 그 가엾은 애심이 엄마는 여류시인에 대해 지나친 억측이 난무할 때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까만옷에 희끗희끗 달라붙은 먼지를 떼내봐요. 그게 어디 희던가요. 워낙 시꺼먼 데 붙어 있다보니 희게 보이는거죠."
모두둘 그래서? 하는 투로 쳐다보면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튀는 사람이 자기가 튀려고 해서 튀는 게 아니에요. 바탕이 튀게 하는 탓이 큰 거죠."
말이 끝나고 몇 초 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아니, 바탕이 뭐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 바탕이 시커멓다는 얘긴가봐요."
"그러니까 그 새댁이 자기가 튀려고 해서 집을 튀어나간 게 아니라 우리 때문에 집을 튀어나갔다는 건가?"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듣겠군요."
뾰족집 여류시인에 대한 반감과 적의로 똘똘뭉친 마을 여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잉잉대고 공격하면 그 가엾은 애심이 엄마는 결국 굴복하여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훌쩍거리며 참회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애심이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마을 여인들 중 아름답고 진실해 보였던 것 같다. 외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추하지는 않았다. 못난 걸로 치자면 애심이 엄마도 내 어머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누가 저 샘의 물을 다 퍼내라고 시켰는지 몰라도 내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여인들 대부분이 기필코 저 존재의 바닥을 보고 말겠다고 소문의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며 추함의 극치를 드러냈던 데 비해, 애심이 엄마는 낯설고 신비로운 존재의 출현에 잠시나마 설렜던 마음을 쉽게 부정하지 않으려는 은장도처럼 작은 용기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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