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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2 "12월 12일," 그리고 12월 12일 2

"12월 12일," 그리고 12월 12일

Posted 2010. 12. 12. 01:12
이상은, 나이를 적어도 열살 쯤 뻥치지 않았을까?
모든 분야에 천재가 있더라도 문학에는 천재성이 먹히지 않는 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진짜 그렇지 않나? 딸랑 20년 살고,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속안에 들어가 한 세기쯤 살아온 말을 해낼까.

머, 어쨌든.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12월 12일!”
   “12월 12일! 네, 12월 12일!”
   신사의 손목을 쥔 채 그는 이렇게 중얼거려보았다. 순식간에 신사의 모양은 잡답한 사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지 못할 사람이 그의 손목을 달려 잡았을 때까지 그는 아무도 찾지는 못하였다
   ……
   침묵…… 이 부득이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안 찾아올 수 없었다. 입을 꽉 다문 채 그는 눈물에 흐린 눈으로 M군의 옷으로 신발로 또 옷으로 이렇게 보기를 오르내리었다. 그의 머리(?)에 가까운 곳에는(?) 이상한 생각(같은 것)이 떠올랐다.
   ……
   “차라리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
    “이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던가. 아---”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빈 것으로만 알았던 그의 가슴 속은 역시 무엇으로인지 차 있는 것을 다시 느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모순된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모순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모순은 그것이 모순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순된 모양으로 되어 있는 진리의 한 형식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한 여름이었던 것 같다. 서점 신간코너에서 집어 들었던 양귀자의 <모순>.
주인공 안진진의 엄마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엄마에게 들어왔던 맛선자리에 여차저차해서 쌍둥이 이모가 나가게 되었고, 그 후 이모는 청담동 사모님으로, 엄마는 가정을 내팽겨친 아빠를 대신해서 생계 마련에 급급한 거친 아낙네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종국에, 두 여인의 인생은.... 모순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어린마음에 이 소설은 은근 충격적이었다. <모순>을 읽고나서는, 주위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행복, 만족감에 대해서 쉽사리 규정짓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나를 찾아오는 허무, 허탈감에 더 민감했는지도 모르겠고.

이상의 단편선에서 쪽수가 제일 긴 "12월 12일"에서, 그,가 내린 결정은, 내가 알던 모순에 대칭이 되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난 양귀자의 모순을 떠올렸고, 12월 12일의 그,와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그가 내린 결정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외쳤다. or so I belived. 그래서 그랬나? 우리의 천재청년, 이상은 이 소설의 두 째 장에 이렇게 말한다.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우선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대답일 것이니. (꼭, 스타일이 <위대한 개츠비>의 도입부 같으다.)
오늘 이걸 다시 읽은 이유는,
12월 12일이, 내가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 짐을 다 정리하고 - 한국으로 돌아온 날이다. 이제 꼭 6년이 되었다.
   모든 것은 다 간다. 가는 것은 어언간 간 것이다. 그에게 있어도 모든 것은 벌써 다 간 것이었다. 다만 그러고는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 그 뒤를 이어서 ‘가기 위하여’ 줄대어 오고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많은 것이 오고 간, 6년 이라는,
언제나 중학생언니가 되려나 지루했던 국민학교 6년과 같은 양의 시간을, 보냈다. 앞 날에 대해서 기대되는게 구체적으로 있기도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그런데 30 몇 년 살아온 게,
들깨칼국수 국물처럼 되직하고 무겁다. 몸에는 참 좋은데, 상큼하거나 깔끔한 맛이 부족한.

오늘을 맞이하여 다시 읽은 <12월 12일>도, 여전히 칙칙하다. 그런데 (yes! there is a "but"!!),
오히려 이상은 안진진이 경험했던 요상한, 긍정을 inject해 주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반가워하여야만 한다. 나는 그들을 믿어오지 않았느냐? 그렇다, 확실히 나는 그들이 반가웠다. 아--- 나는 그들을 믿어---야 한다--- 아니다. 나는 벌써 그들을 믿어온 지 오래다. 내가 참으로 그들을 반가워하였던가. 그것도 아니다. 반갑지 않으면 안 될 이 경우에는 반가운 모양 외에 아무런 모든 모양도 나에게---이 경우에---나타날 수는 없다. 어쨌든 반가웠다.”
   ……
   “혹시 내가 속지나 않은 것일까. 사람은 모두 다 서로 속이려고 드는 것이니까. 그러나 설마 그들이---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바치리라.”
   사람은 속이려 한다. 서로서로. 그러나 속이려는 자기가 어언간 속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속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그 점에 있어 속이는 것이란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반성한다. 그 반성은 이러한 토대 위에 선것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이고 아무것도 반성치는 못한다.
   이때에 그도 확실히 반성하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반성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아무도 나를 속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반가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등의 “……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를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 도덕상에 있어 어떠한 좌표 위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그의 소위 ‘의무’라는 것이 참말 의미의 ‘죄악’과 얼마만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없었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은 도덕의 근본성을 고구하기 전에 우선 자기의 일신을 관념 위에 세워놓고 주위의 사물에 당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후적 실망과 공허를 어느 때고 반드시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이 왔을 때에 그가 모든 근본 착오를 깨닫는다 하여도 때는 그에게 있어 이미 너무 늦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
   이러한 자기 반역도 그에게 있어서는 관념에 상쇄될 만큼도 없는 극히 소규모의 것이었다. 집을 떠나 천애를 떠다닌 지 십여년. 그는 한 번도 이만큼이라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는 냉수에 담갔다 꺼낸 것같이 맑고 투명하였다. 모든 것은 이상하였다.
   ……
   그때 그의 눈은 건너편 벽에 걸린 조그마한 일력 위에 머물렀다.
   December 12
   이 숫자는 확실히 그의 일생에 있어서 기념하여도 좋을 만한 (그 이상의) 것인 것 같았다.
   “무엇 하러 내가 여기를 돌아왔나.”
   그러나 그곳에는 벌써 그러한 ‘이유’를 캐어보아야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말 안 듣는 몸을 억지로 가만히 일으켰다. 그리하고는 손을 내어밀어 일력의 ’12’쪽을 떼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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